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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신심 미사 강론


오늘 공소에 성모 신심 미사를 갔는데
안 보이던 한 무리의 청년들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껄렁해 보이는 녀석들이 어슬렁대고 있길래
수녀님이 어여 오라고 미사 드리는 가정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옹기종기 모여와서
미사를 시작했다.

솔직히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맞이해서 성모님을 좀 알려주려고 하다가
방향을 바꾸었다.
청년들을 보니 '성모님' 어쩌고 하다가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람은 원의가 있을 때 움직여요.
배가 불러서 토할 지경인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줘 봐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죠.
배가 고프면 저절로 음식을 찾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죠?
하루하루 행복하고 싶어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헌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랑 '쾌락'을 착각해요.
참된 행복을 찾아 다니기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찾아다니는 데 여념이 없죠.

쾌락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맥주를 엄청 마시고 나면 잠시 흥건히 기분이 좋지만,
다음날에는 토하고 난리가 나죠.
게다가 정신 없는 상태에서 마누라도 귀찮게 하고 아이들도 때리고 나면
다들 날 미워해요.
마약도 마찬가지죠.
그 순간 순간을 즐기다가 중독이 되고 나면,
마약을 사려고 안하던 짓도 하게 되고
범죄도 저지르는 거죠.
성적인 쾌락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순간적인 걸 즐기다가 책임지지 못할 임신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직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청소년이 아이가 들어서면 참으로 곤란하게 되죠.

진짜 행복은 어디 있을까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청년들의 반응을 잠깐 살폈다.
아직 많이 어려 보이는 한 녀석만 실실 쪼개고 있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몇몇은 이미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표정들이 심각해 보였다.)

잠깐 화제를 바꿔볼까요?
오늘 성모님 축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오해해요.
이런 저런 현세적 바램을 싸들고 와서는,
"아이고 성모님 제가 이런 희생을 할 테니까, 돈 벌게 해 주세요. 직장 붙게 해 주세요."라고 청을 하죠.
그리고 그런 현세적인 충족을 축복,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이 축복과 은총은 과연 뭘까요?
복권에 당첨되어서 수천억을 번 한 아저씨가 그날 밤에 그 돈을 노린 강도들에게 살해 당했어요.
이 아저씨에게 그 돈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꼬마 아이들이 '저주요!'라고 대답했다.)
봐요 아이들도 아네요. ㅎㅎㅎ 그건 저주예요.

그럼 한 아저씨가 엉망으로 살다가 암에 걸려서 비로소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는
하느님 앞에서 깊이 뉘우치게 되었어요, 이 암이라는 질병은 축복이예요? 저주예요?
(역시 아이들이 '축복이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성모님은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와서 은총이 가득하다고, 축복받았다고 하는데,
혼전 임신에 당시 문화로는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어요,
그리고 아이는 나자마자 당시의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해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죠,
그리고 장성한 아들은 그 어미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 밑에서 죽어요. 아무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도대체 성모님의 삶 어디가 축복인가요?

진정한 축복은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예요.
돈을 제 아무리 많이 번다 하더라도 큰 집안에서 식구들끼리 싸우면 불행하고,
비록 가난한 집에 하루에 빵 하나를 가족들이 나누어 먹어도,
가족들끼리 보살피면 그건 행복이죠.

진짜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축복에서 나오는 거예요.
성모님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살았기에 은총이 가득하셨고, 진정 행복하셨어요.
모쪼록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시길 바래요."

그렇게 강론을 마치고
점심을 한 끼 얻어먹고 나오다가 잠시 차를 세우고 수녀님과 커피 한 잔을 나누었다.
"신부님, 내가 강론때 얼마나 기도한 지 몰라요.
아이고 하느님요, 우리 신부님에게 성령의 힘을 쏟아주셔서,
신부님 하는 말이 저 뒤의 청년들에게 쏙쏙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말예요."

"하하, 수녀님, 사실 저도 그 청년들 보고 강론했어요.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까 듣는 것 같더라구요.
걱정마세요. 잘 알아 들었을거예요."

"그러게요, 신부님 강론 참 좋았는데, 모쪼록 그 청년들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수녀님과 담소를 나누다가 다시 차를 몰고 돌아왔다.
모쪼록 청년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어,
그 청년들이 보다 참된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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