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까 13,34)
사제로서는 한국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이곳 볼리비아에서 보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작 3년도 안되는 시간을 사제 생활을 한 반면, 이곳에서는 이제 8년째 사제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결실도 있지만 그 이면의 모습도 존재합니다. 제가 전하는 메세지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그 메세지 때문에 저를 증오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일찍부터 배워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차 예고 하셨으니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세지 때문에 그 메세지를 전하는 이들을 증오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지요.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진노의 잔을 앞에 둔 니네베가 그냥 멸망하기를 바랬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사람들은 뉘우치고 회개하기 시작했고 그 고을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공동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뿐이지요. 기회가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기회가 좋으면 좋은 대로 하느님에게 감사드릴 일이고 기회가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뜻을 품고 계시지요.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불행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를 모시고, 그 수많은 회개와 뉘우침의 기회를 저버리고 오히려 반대로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당시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예수님에게 했던 짓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이들이 있지요. 그들은 예루살렘이 당한 운명을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본당 안에도 작은 공동체들이 있는데 그 공동체들은 저마다 성격이 다릅니다. 또한 봉사자 각자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성경 안에서 표현된 고을들의 운명은 지금의 각 공동체의 운명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각자의 운명이기도 한 셈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는 같은 성격을 공유하는 사건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성격의 역사는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역사를 사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반복되게 됩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고 그리고 부활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요. 반면 세상 사람들의 역사는 저마다 처한 자리에서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 중에는 니네베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들도 있고, 예루살렘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들도 있으며, 또한 배반자 유다나 회개한 베드로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들도 있지요. 이미 멸망한 민족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끝이 뻔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하지만 영원의 역사를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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