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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부족합니다.

집에 엄마랑 아빠가 하도 싸워대서 10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보호하려고 아빠를 향해 칼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이의 마음 안에는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선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아빠를 향한 증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 도출되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어른들의 다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할 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가정의 어른들에게 관심을 갖고 힘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해서 그런 일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제대로만 전해 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구체화하고 살아가는데에 헌신을 했다면 아마 수많은 일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다툼 속에서 아이가 자신의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칼을 집어들고 누군가를 위협하는 행동은 10살짜리 아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데 결국 아이를 거기까지 밀어붙인 셈입니다.

어른들은 그제서야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하겠지요. 마치 아이가 우주에서부터 날라 들어온 외계인인 양 취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의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야 하겠지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해 주고, 아이가 지녔던 아름다운 마음은 되살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칼을 들고 누군가를 위협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다만 엄마를 보호하려던 그 마음은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짚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정에서 과연 누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엄마와 아빠가 죽자고 싸우는 통에 아이가 그 지경까지 이른걸요.

우리는 주변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게으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주 소박한 한 번의 사랑의 행위로 어느 가정에 신앙이 싹트고 훗날 웃음꽃이 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적으로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업을 구상하고 돈을 벌고 안정적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을 터이니 너희는 그 은총으로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신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우리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메세지로 수많은 고통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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