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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여러분은 볼리비아 사람이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후안시또 삔또’(초등학생부터 받는 학습 장려금 한화 3만원 남짓)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웃는다.) 왜냐면 저는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나라의 법에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 나라에 머물기 때문에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의 대통령)가 정하는 법에 따라서 이런 저런 것들을 챙겨야 하겠지만 훗날 제가 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저는 더이상 볼리비아의 법에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에서 한국의 법을 따르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 속한 나라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왕으로, 임금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서로 길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두 상반된 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책상 위에 놓여진 동전을 보면서 한 꼬마는 자기 돈이 아닌 그 동전을 집어들고 오락실에 갈 수도 있고 반대로 어머니에게 거기 동전이 흘려져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아이들은 그 동전을 슬쩍해서 주머니에 집어 넣고 거기에 어머니에게 거짓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미 ‘거짓의 법’을 따르기 시작한 셈이지요. 그 아이는 하늘 나라에 속한 아이가 아니게 됩니다. 반대로 거짓의 나라에 속한 아이가 되는 것이지요. 거짓의 나라의 임금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이 ‘악마요!, 사탄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의 나라의 임금은 악마이고 사탄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사람은 악마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 뿐, 실제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가장이 그전까지 엉망인 삶을 살아 오다가도 마음 속으로 뜻을 굳히고 이전까지의 그릇된 삶을 뉘우치고 앞으로 성실하게 살아갈 각오를 다진다면 그는 이미 마음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지니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고 그 통치는 벌써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 셈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느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척 연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위선적인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하느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면서 겉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척 연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거짓을 좋아하고, 속임을 좋아하고, 탐욕을 사랑합니다.

악마는 자신의 나라의 백성에게 언제나 달콤한 것을 줍니다. 악마도 포퓰리즘을 알고 있거든요. 먼저는 입에 단 사탕을 물려 줍니다. 하지만 악마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제 값을 받아내게 됩니다. ‘너 술 마시고 싶어? 좋아. 마셔. 내가 얼마든지 주지.’ 하지만 때가 이르면 악마는 그 값을 받으러 돌아옵니다. ‘자 이제 너의 건강을 나에게 바치거라. 네가 그동안 술의 쾌락을 즐겼으니까 이제 그 값을 받아야겠다. 아, 그리고 네 가족의 평화도 나에게 바쳐라. 네가 술을 거하게 즐기는 동안 아내가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는 건 너도 이미 알잖아. 그리고 아내의 신실함도 내가 가져가야겠다. 네 아내는 너의 악행에 이미 지쳐 떨어져 나가 새로운 위로 거리를 찾다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그리고 자녀들의 존경도 내가 가져가마. 너는 그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니까…’ 이렇게 악마는 모든 좋은 것을 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께로 나아가십시오.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왕권에 순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날이라서 마무리를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합니다. 왜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너무나도 순결한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되니까요. 미리 그 길을 잘 닦아 놓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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