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변화



견진반 청소년들 성사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일이 터지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감염이 시작되고 상처가 곪을 때에도 아픔이 시작되지만 그것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내버려두다가 결국 그 상처가 온 지체에 영향을 미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로 큰 상처가 되고 나면 그제서야 큰일이 난 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방치하고 있었고, 또 자신들의 잘못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쾌락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소홀함과 쾌락에의 욕구가 결국 그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죽고 싶어한 적은 없다고 변명을 해대겠지만 그러한 행위들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 즉 자신을 어둠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인류 전체는 이렇게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투고 싸우고 증오하며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있고, 지나친 욕심으로 모든 것을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자연을 망가뜨리고 세상을 온갖 더러움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모든 악이 그 시초는 아주 작은 데에서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위대한 선의 결과도 그 시초는 아주 작은 데에서 시작하는 법입니다. 세상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커질 것이고 결국 온 세상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한 본당의 사제가 마음을 바꾸어 진심으로 신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사목을 시작한다면 그 신앙 공동체는 온전히 하나된 마음으로 빛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투덜거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워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 불만스러운 것이 보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만족스러운 행위를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온전히 선택의 여지를 지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의지를 언제나 빛의 방향으로 돌이킬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외적 행위는 내적 결심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외적으로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결심이 서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행위는 소중한 것이 됩니다. 기도는 내적인 행위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가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