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분노, 시기, 탐욕, 증오…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어떻게든 정당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선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자신을 한껏 끌어올려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자신들이 하는 모든 어둠의 활동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다보니 ‘위선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권력이나 명예를 얻게 되면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헌데 때로는 이 뒤따름에는 올바른 생각이 점차로 배제되기도 합니다. 맹목적인 추종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을 지니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보살피고 사랑하고 도와 주도록 이 땅에 보내진 것입니다. 모든 합당한 생각은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불완전함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하지만 맹목적인 추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귀를 열고 살아야 합니다. 형제에게서 들리는 올바른 충고에 귀를 열어야 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서 귀를 열지 못하게 되면 ‘독선’이 시작되고 결국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자신이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올바른 충고를 듣지 않고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없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생각 안으로 더욱 파고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완전히 혼자는 아닙니다. 때로는 동료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어떤 동료들을 주변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동료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고르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연합 세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세력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제가 좋은 소리를 듣고자 모은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진리에 귀를 닫은 폐쇄적인 집단이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는 끊임없는 암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지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집단 안에서는 영원한 우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증오하면서도 같은 이해관계의 모임 자리에서는 영악한 미소를 서로에게 내비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모임에는 ‘사랑’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감으로 인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처방전’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지요. 가장 강력한 사랑의 처방약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처방약을 복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집에 십자고상을 걸어둔다고 그 약을 먹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그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약의 효능을 알지 못하고 그 ‘쓴 맛’ 즉 ‘십자가’에 놀라 그 약을 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만이 그 약을 먹고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세상의 안녕에 익숙해져 있던 교만한 이들은 도저히 그 약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에서의 지위를 고수하면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앞에 두고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약을 받아들여 복용하던지, 아니면 자신의 병세를 견디며 서서히 죽어가던지 하는 결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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