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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함과 약함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1코린 9,22)

성경 안에서 강한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 시련을 견디는 사람을 말합니다. 참을성이 있고 인내로우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지요. 그가 강한 사람입니다. 무턱대고 근육에 힘 좀 쓴다는 사람이 아니고, 또 높은 자리에서 타인을 마구 대하는 사람도 아니지요. 바로 예수님이 강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권력 앞에서 무력해 보였고 침뱉음을 당했고 조롱 당하고 수난 당하고 죽으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약한 사람은 반대의 개념입니다. 성질이 불과 같고 사소한 것에 휘둘리기 십상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집착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주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호기심이 많고 참되고 거룩한 것보다는 찰나적인 것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지요. 바로 성난 군중들이었고 빌라도였고 세상에 물든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고 약한 사람은 속이 굉장히 좁은 사람, 자기 자신 이외에는 타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약한 사람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주면 아직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그 아이는 떠듬떠듬 책을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른이 보기에는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책을 뺏아서 자신이 주루룩 다 읽어 버릴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어른은 아이를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즉, 아이의 심정이 되어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지요. 비록 언어적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아이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인 인간에게 그렇게 다가오셨고,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빛을 찾아 헤메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간혹 매서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새내기 신앙인들이 하는 걸 지켜보면서 답답해 하고 어떻게든 즉각적인 결과를 내려고 가서 윽박지르고 그들이 할 일을 빼앗아서 자신이 대신 다 해버리곤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 안에서도 묵묵히 참아 견디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새내기 신앙인들이 더 강한 이들이지요.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들을 대하면서 결국 영혼을 하느님에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사람, 즉 온순하고 겸손하며 인내심이 있고 선하고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약한 이들을 위해서 약한 이들처럼 되는 강한 이들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 잘난 맛에 자신을 드높이고 타인을 깔보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스스로의 약함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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