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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와 시늉


결과물은 존재하지 않고 적어도 시도한 것 처럼 보여야 할 때에 핑계가 존재합니다. 죄는 지었는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도 핑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핑계라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을 통해서 다른 것으로 메꾸려는 시도이지요. 즉 자신은 착하지 않은데 착하게 보여야 하고, 성실하지 않은데 성실하게 보이려면 자연스레 핑계가 늘고 말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는 단순히 말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도 핑계가 드러납니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핑계는 ‘시늉’이라고 합니다. 일하지 않는데 일하는 척을 하려면 억지로 다른 일을 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혹은 다른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하기 싫고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일에 골몰하는 척을 하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핑계를 대고 시늉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의 마음은 충만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요. 하지만 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불안합니다. 제 몫의 일은 하지 않는데 득은 득대로 보려고 하니 그는 거짓말쟁이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남편은 집안의 가장의 몫을 하지 않고 그저 늘 피곤한 직장인으로만 살려고 하고, 아내는 아내의 몫을 하지 않고 젊은 날의 먹고 놀고 즐기는 아가씨로 돌아가려고 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몫을 하지 않고 한량이 되려고 하고,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몫을 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사랑 받기만 하려고 하니 집안이 이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제는 양들을 돌보지 않고 관리자와 CEO가 되려고 하고, 수도자는 봉헌생활에 헌신하지 않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본당의 사목자나 NGO활동가가 되려고 하고, 신자들은 목자를 존중하지 않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겠다고 양 우리를 떠나버리고 마니 교회 공동체가 이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 나갈 때에 비로소 평화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핑계와 시늉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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