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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마주하고


그는 애시당초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 스스로가 더 뛰어나고 올바르게 분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은 높은 담을 넘어서 흐르지 않는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에게 다가서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허사임을 깨달은 나는 다시 일상적인 주제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연예인 이야기, 잡다한 이슈 이야기들을 나눌 때면 그는 별다른 방어기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이야기나 삶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는 그는 철저히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는 충고하지 않도록 한다. 그는 스스로 부딪혀서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세우려고 하니 일단은 그대로 두고 지켜보기로 한다. 그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 셈이다. 교만한 이들은 죽은 사람이 깨어나 일어날 일을 알려줘도 그 모든 것을 의심할 뿐이다.

거룩한 진리에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 안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이 정말 순수하고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순박한 사람들,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그 참된 진리를 들어 깨닫고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지 못한 채로 하고 있었다. 그는 외적인 결과에 집착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다시 그가 중독상태에 빠지게 돕고 있었다. 그는 그 순환고리에 한동안 집착할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활동에 집중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또 거기에서 나오는 만족감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보다 더 큰 자극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좌절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라도 그가 하느님 앞에 돌아와 뉘우치고 겸손되이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그에 대한 연민에 마음 아프지만 그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길을 가기로 한다. 세상에는 할 일이 아직 너무나도 많다. 고집불통에 독선적이고 교만한 이를 붙들고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생명의 샘을 기다리는 순박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고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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