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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광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 1,23)

두 가지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을 담은 구절입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그리스도가 계시의 빛이요 영광이라고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런 분께서 걸림돌이자 어리석음이 되셨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시메온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로 받아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상반된 이야기이지만 전혀 상반되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그리스도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지요.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선생님은 배우려고 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분이 되지만, 반대로 수업 시간에 농땡이를 치고 어떻게든 수업을 빨리 끝내고 싶은 학생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려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선생님이 1분 더 넘게 수업을 하면 배우려는 열망에 가득한 학생은 그 선생님이 고맙기만 하고, 반대로 배울 생각이 없는 학생은 그 선생님에게 도리어 화를 내겠지요.

시메온 예언자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린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예언을 했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냉냉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어떠한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예수님이 걸림돌이 되고 그분의 가르침이 어리석음이 되는 이들은 불행한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어두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실제로 그런 이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자신들끼리 아주 영리한 세상의 법칙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대로 살다가는 우리 모두 굶어죽기 딱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당에 나가고 온갖 거룩한 척 전례에 참여하지만 실제 마음으로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배를 더 사랑하는 이들이지요.

반대로 세상 안에서 손해를 보면서까지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당하는 손해를 서러워하기보다도 희망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괴짜라고 부르곤 하지요.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돈을 쪼개어가면서도 봉사를 하는 사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멍청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변덕일 뿐입니다. 어리석음이고 걸림돌이기만 하던 그분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빛과 영광이 되는 순간 우리는 구원에 이미 가까이 다가서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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