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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영혼



바람을 채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물을 소쿠리에 담을 수도 없지요. 소리를 눈으로 들을 수 없고, 냄새를 귀로 맡을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수용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을 통해서 나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과 하느님을 지성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지성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학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 박사를 따고 교만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고, 수많은 영성 강좌를 듣고도 여전히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신앙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담아야 하고 그 이전에 굳은 결심으로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담기는 곳은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우리의 영혼 안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의지가 들어있지 않은 행위에는 사랑이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반대의 경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그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의지가 포함되지 않은 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어른이 아이의 손에 칼을 쥐게 하고 그 팔을 강제적으로 휘두르게 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문들은 어떻게든 인간의 의지적 선택을 경감시키려고 온갖 학설을 끌어들입니다. 툭하면 유전자에서 기인한다고 하고, 툭하면 심리적 질환이고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 인간의 의지적 부분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진정한 변화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곤 합니다.

과거에는 심리학이라던지 유전자학이라던 것이 없었습니다. 반면 신앙이 더 활성화 되어 있었고 더 순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볼리비아 시골에 가 보면 문명의 이기는 없지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땀흘려 일하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수단들, 미사와 성사들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들이 하느님을 느끼고 사랑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의심하기가 바쁩니다. 지금 자신이 참례하고 있는 미사가 정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적인 요소들을 뽑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즉, 미사의 심리적 효과 따위를 찾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분명히 영혼이 있고 영적인 요소들은 영적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누군가가 하느님 안에 건강하게 머물러 있다면 그에게는 심리학의 도움과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운전기사가 있으면 차가 잘 보살펴지고 걱정 없이 운행되는 것처럼 영적인 바람직함이 모든 나머지 것들을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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