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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37-39)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한 계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계명인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계명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만큼 사랑하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엇나감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고 그저 우리 삶의 하나의 옵션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련된 것들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면 언제라도 거기에서 도망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미사 안 나가면 되지.’
‘성당 안 다니면 되지.’
‘여유를 좀 찾고 나갈께요.’

우리는 이런 저런 도전들 앞에서 이런 말을 쉽게 쏟아냅니다. 그러나 위의 표현들을 세속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직장 안 구하면 되지.’
‘밥 안 먹으면 되지.’
‘여유를 찾고 돈 좀 벌께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세상 안에서 직분을 상실하거나 당장 우리의 육신에 양식을 주지 않으면 그 고통스러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다음으로 미뤄 두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한 결과는 꽤나 나중에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일상을 올바로 가꾸어 나가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어떤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과 사랑을 향한 나의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밖의 사랑도 올바른 형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떠할까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이들은 마치 사랑의 투사라도 되는 듯이 인터넷 상에서 활동하지만 구체적인 사랑 실천의 현실에서는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서지만 정작 자기 가장 가까운 가족도 참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나아가 우리는 사랑을 받는 데에 익숙하지만 사랑을 내어주는 데에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군가 그 일을 먼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지요.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고 우리의 의지적인 다가감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단순히 너희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몰려 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도전이 되는 사람, 쉽지 않은 사람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미숙한 이들이고 사랑을 배워 나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모쪼록 주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사랑을 열심히 실천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하느님을 마음 깊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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