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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영과 현세적 인간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코린 2,14-15)

하느님의 영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해결할 방법을 찾고 해결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세적 인간에게 하느님의 영이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어리석음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영’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속을 열어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영은 거룩하고 내밀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활동은 영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의 영의 상태에 따라서 외적인 것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둠의 영을 지니고 있으면 그 영에 따라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은 빛을 꺼내지 못합니다. 언제나 어둠 앞에 파묻혀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꺼내는 모든 것은 어둠이지요.

반대로 우리가 빛의 영을 지니고 있으면 빛에 따라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빛에 따라서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을 즐기게 되지요. 그것들이 빛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 밖의 어떤 존재도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살아가는 이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두부로 칼을 자를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칼이 두부를 자르는 것이지요. 이리저리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자를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로 나무의 길이를 재어야 하지요.

이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이는 그렇지 못한 이를 분별할 수 있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그 판단을 맡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아니 있을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둠의 영을 지닌 이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적 인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모르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판단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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