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신앙은 어떻게 전해지는가?



물은 어떻게 흐를까요? 먼저는 수원지가 필요합니다. 샘이 솟는 곳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수원지에서 물이 벗어날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그리로 흐를테니까요. 중간에 물을 빨아들여버리는 습지대가 있어서는 안되고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잡동사니와 쓰레기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아래를 타고 흘러 내려갑니다.

신앙이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흘러가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끊이지 않고 샘솟는 수원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하지만 우리의 선조 가운데에서도 그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건 우리의 부모님이 될 수도, 혹은 나 자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지요.

수원지 근처에는 물을 오염시키는 것들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맑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이 기복적인 것으로 물들어 버리거나 엉뚱한 세속적 욕망과 뒤섞여 버리면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고 맙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로 흘러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들의 신앙을 정말 맑고 진하게 유지한다면 그 신앙의 기쁨은 절로 자녀들에게 전파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받아들인 신앙의 행태가 지극히 기복적이고 의무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면 합리성에 눈을 뜨는 자녀들이 그런 신앙을 자신들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또한 어떤 부모 세대 가운데에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파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는 자신들이 받아들인 신앙 자체가 그릇된 이유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써 본 좋은 물건이나 재미난 영화를 자녀들에게 추천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 세대가 신앙을 전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체험한 신앙이 하나의 족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느끼는 기쁨이 하나도 없고 그 모든 것이 의무화되고 부담처럼 느껴져서 자녀들에게 그런 체험을 시켜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신앙을 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누리는 신앙의 체험이 기쁨과 감사이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허락해 주시는 하느님에게 대한 감사, 나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느님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신앙은 절로 자녀들에게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신자들은 고리타분한 신앙생활 가운데 스스로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에게 과한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짐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짐을 만들고 거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더욱 자유롭고 기쁘게 생활하기를 바라십니다. 누구든지 참된 신앙의 본질에 다가서면 그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기쁨의 생활이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