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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믿음



유다인들에게는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즉 하느님 앞에 설 만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실천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담긴 것을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율법들 가운데에는 정말 당시에 필요해서 실천해야 할 요소들도 있었지만 후대에 가서는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들도 있고 올바른 해석을 통해서 시대에 합당하게끔 적용되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가량 예전에 없던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인터넷의 이용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한 셈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 율법 규정 자체에 사로잡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 안에서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할 인간들이 도리어 율법 안에서 구속되고 더욱 불안한 삶을 유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오신 하느님께서는 참된 율법을 전해 주기로 결심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참된 계명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법의 규율 안에 놓여진 죄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하시고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에만 매여 있을 뿐이지요. 바로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미리 얻어 놓으신 ‘의로움’의 상태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현실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힘을 잃은 자리에 우리는 또다른 것들을 채워 넣어서 본질을 흐려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 하는 것이지요.

묵주기도를 얼마를 바쳐야 거룩한 사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본도 안 된 사람… 특정 신심 운동에 참여해야 그래도 신자 생활을 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자격 미달인 사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여전히 외적 행위를 바탕으로 내적인 신앙을 가늠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한 본당을 파악하는 수단으로는 미사 참례자 수, 판공 성사자 수, 구역 신자 현황, 교무금 현황 등등이 주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지금까지 ‘더 나음’의 기준을 습득해 왔기 때문에 여전히 교회 안에서도 그런 똑같은 방식의 세속적 ‘더 나음’의 방식을 고수하는 셈입니다.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로마 3,27)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옭죄고 있는 외적 행위와 형식의 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그분을 믿고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멍에를 매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히말라야 산을 오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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