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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목적지



목적지가 없이 걷는 걸음은 없다. 비록 한 순간의 산책이라 할지라도 그 지향하는 목적이 존재하고 또 집으로 돌아온다는 목적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정신병력을 의심하게 된다. 즉 그가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뚜렷이 드러나는 삶의 범주 안에서는 확고한 사실이 우리의 ‘인생길’에 있어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설정해 두고 살아가긴 한다. 하지만 그 목적지가 자신을 진실로 충만히 채워줄 것인지 아닌지를 올바로 살피고 걷는 사람은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이 설정한 마지막 목적지가 벼랑 끝으로 가서 추락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목적지를 올바로 직시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걸어가는 동안의 길이 편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과도 같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고 이뻐지려고 한다. 그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는 것인가? 정말 그 지향점을 올바로 생각을 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인가? 이뻐지려고 투자했던 모든 노력이 결국 무너지고 말 허망한 길에 투자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가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자괴감을 더욱 극명히 느끼게 된다면?

이런 아주 간단한 사고 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누가 대신 자신을 위해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듣는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몫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이 발을 씻도록 허락해야 했다. 그래야 베드로도 거저 주어지는 은총의 몫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나의 목적지는 하느님이며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길을 간다.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길을 소개하고 초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응답하는 사람의 수는 예상외로 적다. 그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그 목적지가 자신들에게 전해주는 결과물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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