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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인간



하느님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그 자연 안에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자연은 그대로 보시니 좋았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자연 속에 하느님은 ‘인간’이라는 특이점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다른 점은 그 인간 안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부분이고 거의 하느님스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사랑’의 흐름 대로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전적으로 수용해서 스스로 사랑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사랑을 증폭시키고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자연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던 자연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파괴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에게 ‘한계’를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죽음’이었지요.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 속에 한계를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인간에게 ‘회복’의 가능성을 두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지금의 방향을 뉘우치고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두셨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의 길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즉, 그런 회복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자신이 가는 어둠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과 반대로 그런 회복의 가능성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새로이 탄생하게 되는 사람들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아직 진행중이고 이 일의 마무리가 어떻게 지워질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애초에 자연이라는 것을 만드셨고 이 모든 일 안에는 일종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선한 것은 선한 결과를 낳고 모든 악한 것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상황 안에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여전히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무턱대고 기도를 오래 많이 하면 좋은 신자가 되고 반대로 세상 안에 살면서 책임감 있게 살고 바른 양심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는 그 올바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분의 삶을 배우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 우리의 닫힌 눈을 열고 올바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국영수에 중점을 두는 엄마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 신앙과 바른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엄마, 우리는 이 둘의 사이에서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 놓인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는 훗날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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