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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과학적으로 시도 가능하다고 무조건 이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서 그릇을 떨어뜨릴 줄 안다고 실험해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이는 그 실험의 결과로 그릇이 산산조각나고 그것을 다시 붙일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과학적 진보에 항상 바람직한 견제를 가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과학자들은 시도해 볼 능력이 있지만 '수습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자력을 실험해 볼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의 방사능을 어찌할 수 없고, 블랙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순 있지만 그 만들어진 블랙홀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세포를 가지고 생명조작 연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생겨나게 될 결과가 어떠할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과학은 영리하지만 신앙은 지혜롭습니다. 과학이 이제 갓 성인이 되어서 술도 진탕 마셔보고 문란한 성도 즐겨보려는 철없는 젊은이와 같다면 신앙은 그러한 일의 결과를 미리 조심시키는 현명한 어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젊은이는 '어른의 권위'를 파괴하기만 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따라서 신앙이 과학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해서 사람들의 내면 안에서 신앙의 진정한 가치를 멀어지게 만들고 새로운 과학, 최신의 과학에 환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젊음의 활기가 필요하고 그 힘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과학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그 범주를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을 상실하게 하는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인 영역을 넘나들 때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

맞습니다. 신부님 중국에서는 유전자변형을한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걱정도 됩니다. 모기도 유전자 변형을해서 번식후 피도 못 빨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또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인간 중심적으로만 사용하면 결국 인간만 남게 되고 인간또한 건강하지 않게 되겠죠. 지금이 정말 멸망 되기 전의 순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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