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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다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하려면 그 이전에 들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듣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나의 욕구를 자극시킬 만한 요소를 나의 내면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본당에 어느 신부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저마다 그 사제에 대한 정보를 나눌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그 사제에 대한 수많은 평가가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제가 좋은 사제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을 닮은 사제가 좋은 사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의 어떠한 행위에 우리는 관심을 가질까요? 예수님을 단순히 현세적인 짐을 덜어주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어마어마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에 병자가 있으니 무조건 낫게 해 달라거나, 사업을 하는데 일이 잘 안풀리니 도와주시어 내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는 식의 청을 드리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찾는 이라면 그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세주께서는 구원을 선물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제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게 나뉘게 됩니다. 골프를 잘 치는 사람들은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것이고 곧잘 건축 사업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큰 사업 건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 가난한 이를 돌보는 사제는 가난한 이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사제는 말씀에 목마른 신자들에게 사랑받을 것입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예수님의 소식을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고 그분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그분이 지나간다는 소식에 그분을 찾아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곁에 지나가도 제 이득에 골몰하느라 그분이 누구신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건만 눈먼 거지는 예수님이라는 소리 하나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던 이들이 그의 갈망을 막아섭니다. 이것이 신앙인에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구원을 찾기 시작할 때에 언제나 방해가 시작됩니다. 사실 방해가 없는 구원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정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속이라는 영역을 살아가면서 구원을 찾을 때에는 언제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이는 마치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 하십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그의 부르짖음에 멈추어 서십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방해를 일삼던 주변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경은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황당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확인하셔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신앙의 여정에서 앞서 가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언제나 자신의 내면은 성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된다고 해서 다시 길을 엇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멈추어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여정에서 내가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나는 그분에게서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가?


눈 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눈 만이 아닙니다. 영혼이 메말라버린 사람은 영혼의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미사를 아무리 나와도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현대에는 영적인 가치에 눈 먼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소경은 자신이 눈 먼 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구원의 말씀이 들립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나의 몫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나의 굳은 믿음입니다. 주변에 넓은 호수가 있어도 그것을 담아낼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듯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도 그것을 담아낼 믿음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소경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댓글

고옥숙님의 메시지…
신부님의 말씀으로 저의 부족함을 채우고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멈추어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는 신부님 말씀 명심하면서 믿음을 굳게 다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옥숙님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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