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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알아볼 눈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금전적 이득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음껏 돈을 걱정없이 쓸 수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평화는 '존재'할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평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도대체 얼마나 돈을 써야 만족할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오감이 만족스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참된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평화가 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이들은 실제 예수님이 바로 곁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평화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평화인지 모르는데 그 곁에 평화가 지나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좋은 포도주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차라리 막걸리나 한 병 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평화를 알아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제 아무리 평화의 가르침을 전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은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진 것처럼 그것을 물어뜯고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말하는 깨어있는 종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준비된 태도를 가지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쏜살같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 줍니다. 그들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야욕과 탐욕,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낱같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싶은 욕구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오직 주인의 도

심는 사람, 뽑는 사람

무언가를 심고 키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심어 놓은 것을 뽑고 망가뜨리는 사람, 나아가 심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은 그냥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수고로 씨앗이 뿌려지고 돌보아지며 오랜 인고의 결과로 열매가 자라나고 수확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국땅에서 지니고 있는 모든 신앙의 씨앗들은 우리 선조들의 피의 순교의 결과이기도 한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언제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심는 데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들지 않으면서 심는 이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신앙 영역 속에도 공존하기 때문에 그저 성당을 같이 다닌다고 무조건 신심이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비가 땅에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가 닿습니다. 허투루 쓰여지는 빗방울은 없습니다. 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닐 하우스 위에 떨어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비를 받아들일 땅으로 흘러 내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신의 사명을 다 수행합니다. 은총에 목마른 이들은 은총을 받아들이고 기뻐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게 된 기쁨을 나누는 데에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반대로 훼방꾼들은 훗날 주님이 오실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신뢰하지 않은 그들은 그분의 진정한 힘과 권능이 드러날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파견된 자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파견될 차례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이곳에서 꾸준하게 가르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살이의 멍에'를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해 오던 것을 하는 데에 안락함을 느낍니다. 거기에 어찌나 고착화 되어 있는지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그것이 아무리 본질에 더 가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거부부터 하고 봅니다. 율법에 고착화 된 상태, 하지만 갈라티아서가 말하듯이 그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동습성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을 죽은 것 가운데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말하는 것도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그 주변이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이 장소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도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애착한다고 해도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가 아무리 융성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그들의 권위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나 잠깐 누렸던 것들일 뿐 지나고 나면 모두 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초전이라는 공동체는 참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 공동체에 예수님이 오더라도 아마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장이 되고 텃세가 생겨나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들의 속에 가득찬 것으로, 성경에 의하면 탐욕과 사악으로 잔치를 벌이게 됩

끌림과 거부

법이라는 것은 선을 긋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선과 무관합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국경 안에 들어선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이 있지만, 단순히 그것이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데도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이 나라 사람인데도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끌림과 거부에 가깝습니다. 참새가 향긋한 곡식에 끌리고, 무서운 동물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에게 끌림을 느끼고 하느님 아닌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몸과 영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몸이 끌리는 것은 영이 거부하는 것이고 영이 끌리는 것은 몸이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지키려고 하는 이는 사실은 선 너머에 있는 것에 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끌리지만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기에 그어 놓은 선에서 멈추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는 선 너머에 있는 것에 갈증을 느낍니다. 이를 말하는 것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복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나에게 요구되는 ‘포기’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님을 악마가 있던 광야로 보낸 것처럼 때로 우리를 인도해서 시련을 겪게 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내면의 끌림을 왜곡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는 세속에 끌리는 자들이 신앙에 끌리는 자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이 마치 옳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가와서 성사의 은총으로 내면의 씻김을 받게

가르침의 등급

가르침에는 여러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대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급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가르침에도 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성에 찌든 이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아무리 전해 준다고 한들 졸음이 쏟아지기만 할 뿐 들을 리가 없습니다. 유치원생에게 복잡한 방정식을 가르쳐봐야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혼할 수 있을까?'를 찾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즉 땅으로 치자면 돌이 많고 단단하게 굳어 있으며 비료도 뿌려져 있지 않은 땅에다가 소금기가 많아 그 어떤 작물도 자랄 수 없는 땅인 셈입니다. 그러니 그런 땅에는 섬세한 영성의 씨앗을 뿌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이혼을 하더라도 최소한 이혼장이라도 써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이 무딘 이들에게는 '규정'이 중요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때문에 '최소한 이 정도라도 하라'는 규정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가르침으로 잘 다져진 마음밭에는 좋은 씨앗이 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맑아서 하느님의 가르침이 잘 수용됩니다. 세속성에 찌든 이들은 그들 안에 쌓여 있는 온갖 쓰레기와 먼지를 치우고서야 비로소 가르침이 자리잡을 수 있지만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받아들이듯이 수용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하느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고 그분의 축복을 항상 받고 살아갑니다.

영혼을 접착하다

세상에는 '접착제'라는 게 있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다시 원상태로 붙여 줍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원래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온 같은 질료들입니다. 그래서 원래가 하나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개입해 들어와서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영혼의 접착제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역할을 하라고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따르면 그분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 주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하나로 이어진 우리들은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하나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럼 반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 친한 듯이 우정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내면 속에 무엇을 감추고 살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의 내면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뒤늦게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내면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다가 늦게서야 알고 땅을 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서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그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알기에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분에게 고난을 통해서 완전으로 다가오라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가셨다면 우리라고 무엇이 더 다른 게 있어서 다른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다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와 피조물은 같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협력자'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같은 인간에게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통해 사람을 서로 동등한 존재로 만들어 내십니다. 두 존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완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세기는 '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죄는 '파괴'를 의미합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물과 하나로 맺어져 있는데 죄는 그 관계들을 하나씩 둘씩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들 사이에도 서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에 와서 부정할 수 없도록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의 주제는 '관계의 회복'에 중점을 둡니다.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이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녀들로써 기쁨을 얻으리라 희망하지 말고 영원 안에서 만날 자녀들, 영적 자녀들을 얻음으로써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