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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부활이 지나고 사도들은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으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활동은 순탄치가 않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제가 그의 동조자들인 사두가이파와 함께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들이 '시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성당에도 당시의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같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당의 구석구석에 관여하면서 마치 성당이 자신들의 놀이터인양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이 놀고 있는 곳이 지금까지 놀아오던 대로 편안하고 안락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니라 곧잘 정치활동을 합니다. 자신의 편이 누구이고 상대의 편이 누구인지를 나누고 자신의 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적대화하고 모여서 험담하고 뒷담화를 나눕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같은 이들이 너무너무 싫고 그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죽여 없애기라고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꾸며냅니다. 자신의 평판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거짓된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누군가를 돕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을 애써 소문을 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생색낼 걸 다 내면서도 자신은 그걸 '몰래' 하고 싶었다고 곧잘 표현합니다. 참으로 역겨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기심은 악마적인 감정으로 다른 이의 선한 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선의 정도에 따라서 시기의 강도도 달라질 것이며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었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로서 그에 대척하는 이들의 악은 더 강한 셈입니다. 복음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저마다의 믿음에 따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아이들이 편히 잠들 수 있는 이유는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슈퍼맨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빠가 자신들을 마지막까지 책임져 줄 것을 믿고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불안한 이유는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당연시 되어왔던 것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현대인들은 그 불안증을 어떻게 해소시킬지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그 불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결국 죽음이 우리를 뒤쫓아 오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 이 두가지는 정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신실한 어른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신앙 안에서 늘 평온함을 잃지 않는 어른들의 특징은 신심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하느님께 맡기고 신앙 안에서 쉽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마치 어린아이 같습니다. 반면 조급한 어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자신들에게 저주가 됩니다. 평화롭지 못한 노년. 불안하고 어지러운 삶. 왜냐하면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오지만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성당이 삶의 습관으로 굳어버렸을 뿐입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특징이 늘 불안하고 짜증스럽고 뭔가 호기심거리를 찾아서 눈을 희번덕 거리고 궁시렁 거리고 뒷담화를 즐깁니다. 혼자 있으면 더욱 불안해져서 누군가를 찾는데 그렇게 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오면 마음은 더욱 쓰레기통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시작

예수님 안에서 - 사도들의 모든 환난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었으면 이 길을 계속 갈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들도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환난을 겪고 - 요한 사도가 예수님 안에서 겪은 것은 환대나 인정, 칭송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환난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신앙에 더욱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마치 자연스러운 귀결인 양 환난이 따라왔습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 충실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뜻 스스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신앙에 더 충실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앙이 자신에게 득이 될 때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날 그들은 가차없이 신앙을 던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로 신앙에 충실한 이들은 그런 위선자들로부터 배척당하고 환난을 겪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여 - 우리가 이런 환난을 견딜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건 바로 그분의 나라이며 그 나라는 훗날 가게 될 나라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나라입니다. 신앙에 충실한 이들에게 그것은 헛된 약속이 아니며 지금 이미 시작된 약속입니다. 사실 신앙을 믿고 충실히 따르는 이들은 이미 그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겪을수록 주님의 위로 외에 다른 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친한 시늉을 하지만 결국 저마다의 이해관계 속에서 배신을 하는 게 일상인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위로는 영원에서 오는 것이고 그 위로 안에서 살아가는 이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인내 - 환난의 자연스런 결과는 인내입니다. 환난이 다가오면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모든 덕의 텃밭이 됩니다. 마치 밭을 잘 갈아야 거기에 좋은 열...

신앙 안에서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도들이 한 일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들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둘째도 비슷하지만 조금은 차원을 달리하는 일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당대에도 여러가지 필요가 있었겠지만 사도들은 다른 것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더 벌게 해 준다던가 고민하는 일을 해결해 주는 세상의 해결사 같은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은  가장 근원적으로 인간의 두 가지 괴로움, 즉 영혼과 육신의 괴로움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가지 면에서 오묘합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그 육체는 영혼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아프면 영혼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배가 고픈 것과 배가 아픈 것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고통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잠깐의 부족이지만 배가 아픈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식은 하지만 자해는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데에 방해되는 요소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애를 치워 주었습니다. 그것이 치유로 드러났습니다. 치유는 사도가 손을 뻗는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굳이 치유의 합당한 과정을 설명해 보자면 그것은 치유받는 이의 내적 회개과 하느님을 향한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즉, 치유는 아무에게나 잘 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열매맺으라고 주어지는 일종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치유는 따라서 ‘사명‘이 됩니다. 치유를 받은 이는 자신의 쾌락을 추종하기 위해서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치유는 곧잘 악마의 장난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위해서 간을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그 치유는 과연 누가 선물하는 것일까요? 그건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으라고 선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다

어떤 향이든 거기에 알코올을 섞으면 그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서 신앙의 본질은 뜨겁고 강하고 뚜렸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할수록 의심하게 되고 흐릿하게 되고 유연한 척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진정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제자들은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사람들은 다른 것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뜨거운 불이 마른 장작에 쉽게 불붙어 타오르는 것처럼 사도들의 신앙은 주변에 널리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날은 상황이 다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고 이루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신앙의 불이 아무리 뜨겁에 타오른다 한들 마치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은 영원을 위한 현세의 포기를 가르치는데 이미 물들어 있는 영혼 속에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의 어르신들은 여전히 40대 50대의 욕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나이가 지긋하면 신앙의 꽃이 피어야 할 자리에 여전히 주저함과 미심쩍음과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직 잃을 게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열매맺지 못하는 이에게서 그 몫을 빼앗아서 열매를 맺는 이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가서야 자신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가 후회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세대

손을 붙들어 일으킵니다. 하지만 힘없이 늘어진 손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어 그 축 처진 손을 붙들어 들어 높입니다. 하지만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제 그의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열심히 손을 들어줍니다. 그가 일어나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어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사실 그걸 알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일을 하라고 보낸 분의 의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그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앉히고 상처 난 곳을 싸매 주고 또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줍니다. 이 일을 벌써 몇 번이나 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그는 다시 주저앉고 쓰러져 버립니다. 먼지가 푹푹 날리는 흙바닥 속에서 그는 자신은 이 상태가 편하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건 로마 병사들이었지만 그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간 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살인자였고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을 구원할 왕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왕으로 삼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분이 가르치는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가진 사회적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분이 가진 세속적 영향력에 잠깐 감화받았을 뿐입니다. 군중은 그 누구도 예수님이 전하는 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일은 로마인들이 했지만 살인은 그들이 저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용기 있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도 겁쟁이였습니다. 불가에서 그를 두고 예수와 같이 보았다는 여인의 말에 그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하지...

사람의 다양한 부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는 이 /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이야기해 준 이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하는 이들 / 진리를 전하는 이를 죽이려는 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하는 이들 / 진리를 전하는 이를 죽이지 않는 이, 오히려 그를 사랑하는 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순교자의 후손은 두 종류가 있으니 순교자의 육체적 후손과 순교자가 한 일을 따라 하는 이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육체적 후손이 순교자가 한 일까지 따라서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의 육체적 후손이 순교자가 한 일을 하지 않고 반대로 진리를 전하는 이를 죽이려고 든다면 그들은 사실 영적인 의미로 순교자의 후손이 아닌 셈이 됩니다. 결국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자유로운 사람과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신분제가 있었고 실제 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의 육체적 후손이 순교자의 후손이 아니듯이 단순히 어느 집에 종의 신분으로 산다고 해서 그가 영혼까지도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돈이 많고 유력한 집안 자식 출신이라고 해도 그가 죄 속에 머물러 산다면 그는 죄의 종이 됩니다. 죄는 그것을 짓는 자들을 구속합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쫓겨 납니다. 성당을 다니지만 성당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면 그는 결국 쫓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그저 허울뿐인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를 전하는 이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실행하는 이들이 되길 바랍니다. 

부끄러운 일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마저 벗겨지십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무엇이 진정하 수치인가?' 무엇이 진정한 수치일까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게 수치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대전 앞에서 영구히 쫓겨나는 것이 수치일까요? 여기에서 신앙이 갈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분을 실제 계신 분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중시하고 심지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이면 다가서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비교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고만고만한 우리 이웃들을 보면서 좀 모자란 것이 정상이고 가난한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가장 최고의 것을 찾아다니면서 지금의 우리를 비교해 보며 우리의 삶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한 분 앞에 머물러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참된 수치를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복음의 군중처럼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왕으로 세우려던 사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악을 쓰는 장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의지하는 자는 헛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된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분 마음에 드는 일

예수님께서 하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고 진리와 선과 사랑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둡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리로 불뱀의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이라도 구리뱀을 보면서 살아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일이 있습니다. 성탄이 다가오면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부활이 다가오면 부활절 행사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추구하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예컨데 부활 행사를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붙고 서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건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부활 행사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교회의 여러 단체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납니다. 아무리 성가대를 한다고 해도 아무리 전례를 위해 봉사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구원을 위한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의 모종의 파티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라는 것은 뭔가 하나를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방향성의 문제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는 그냥 가만히 숨 쉬고만 있어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진심으로 참여하는 성 시간과 같은 일입니다. 또한 정신없이 바빠 심지어는 기도할 시간이 없을 때조차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실제 가난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시간 동안에는 정말 코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짐짓 거룩한 일들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무작정 말에서는 안 됩니다. 속지 않도록 ...

습관화된 고해의 위험성

세상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들은 돈벌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를 추구하면서도 그 죄를 단죄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죄인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 그녀를 단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간파했고 그것으로 여인을 돌팔매에서 구해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했지만 핵심적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 즉 자신의 삶에서 수많은 오류를 경험한 이들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씩 떠나갑니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배웠던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말은 앞서 38년을 앓아 온 사람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인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결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여인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 체험으로 다시는 죄악으로 다가서지 않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무사히 넘겼으니 다시 새로운 죄의 대상을 물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결정하게 여지를 남겨둡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봅니다. 그러나 때로 그 안에서 절박함이나 진실성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저 습관화되고 의무적인 고해를 보는 사람이 많고 다시 얼마든지 같은 죄를 반복할 의도가 다분한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오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

상대적 가치

우리는 가치가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릴 때에 정말 갖고 싶던 장난감을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면 왜 저런 것을 그토록 갖고 싶어했나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는 이 사람 아니면 죽을 것처럼 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이 사람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초월적인 가치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 놓인 세상을 일컬어 '쓰레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 것들이 모두 쓰레기라는 말이 아니라 영원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앞에 두고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닌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 세상은 비슷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 힌트를 조금씩 보여 주십니다. 모든 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상에서 누리던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엄연한 진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같은 가치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고집스럽게 세상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안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세상에 다른 가치, 초월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앞에서 그 가치를 전해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때가 차면 우리는 뒤에 남겨진 것들을 내버려두고 다시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새 일

광야에 길을 내다 광야는 메마르고 험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강도들이 사는 곳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그곳에 길을 내어 사람들이 길을 찾게 하고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막에 강을 내다 사막은 물기가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영적인 사막과 같은 곳으로 저마다 스승이라고 외쳐대며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들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참된 생명의 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주님은 그 사막에 물길을 마련하시고 강물처럼 그것을 흐르게 하십니다. 누가 와서 마셔도 전혀 줄지 않는 물을 주십니다.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짐승들도 참된 것에 대한 감각은 살아 있어서 남다른 일을 보면 감탄할 줄 알고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공경할 줄도 압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지만 정작 로마의 백인대장은 그분의 본모습을 이해하고 경외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런 이들을 구하러 왔고 그들을 선택한 백성으로 삼을 것입니다. 반면 자신들이 안전한 영역에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다 찬양이라는 것은 사실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작된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의 해를 살고 있지만 사실 전례라는 것의 본질은 우리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 본질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례는 딱딱하게 굳어진 행동이며 그저 전례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것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려 교만에 사로잡히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눈이 머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는 눈이 손상되면 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눈이 멀게 되는 이유는 아닙니다. 눈이 멀쩡해도 누군가가 눈을 가리면 눈이 멀게 되고, 또 눈이 볼 수 있는 빛이 사라져도 눈이 멀게 됩니다. 영혼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은 사람들의 빛에 깨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돈에 눈머는 영혼은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돈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때에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눈멀기 시작하면 그런 순수했던 영혼의 상태가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돈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하면 도리어 영혼의 본질적인 눈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돈 때문에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탐욕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악은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살리려는 사람에게 살기를 띠게 되고 반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철두철미하게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의로우신 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의로움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인은 악인의 표적이 됩니다. 악인은 그런 의인을 한편으로 시기하고 한편으로 증오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악은 그렇게 사람들의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급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당신 품 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어떤 식으로든 바라본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배우는 존재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한 번도 듣지 못했으면 그에게는 눈 앞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그 영원이라는 가치를 어떤 식으로든 볼 수 있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외견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내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존재는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뒤쫓을 때에 우리는 헛된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나의 소중한 몸에 몹쓸 짓을 하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까지 더 큰 일들까지 모두 보여 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여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꼬마 아이가 기껏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눈 앞에 놓인 사탕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꼬마 아이에게 그 아이가 자라서 크게 될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한 줌 사탕에 불과한 이 세상을 추구하느라 진을 뺍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영원의 미래상을 그려보일 수 있어서 그를 신뢰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예수님을 보낸 아버지를 신뢰해서 그분들이 보여주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누군가 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

죄와 나쁜 일의 연관성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사람이 좋지 않게 변해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삼구를 말합니다.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이 세 가지는 나름의 특징으로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어둠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세속에 이미 찌들어 있는 사람은 세속이 더이상 유혹이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세속은 끊임없는 유혹이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이집트를 그리워 한 것처럼 세속은 하느님을 향해 여정을 떠난 이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유혹을 던집니다. 육신은 그 기본적인 필요를 떠나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육신은 항상 영혼이 나서야 할 때에 멈추도록 유혹합니다. 더 쉽고 더 편한 것을 찾아서만 살아가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가 말씀의 봉사자가 되거나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의욕을 꺾으려고 합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하게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것을 이용해서라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마치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는 듯이 보이게 하여 우리를 착각하게 하고는 실제로는 하느님 아닌 것을 추구하게 해서 우리를 더욱 교만하고 허영에 가득차게 만드는 일도 허다합니다. 이런 죄는 우리를 타락시키는데 그 타락상은 영혼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과한 술은 간을 상하게 하고, 지나친 쾌락의 추구는 그 기관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 먹어댄 것이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장애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사람은 다름 아닌 죄의 결과로 육체의 괴로움을 얻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깁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