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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제와 사두가이파




부활이 지나고 사도들은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으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활동은 순탄치가 않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제가 그의 동조자들인 사두가이파와 함께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들이 '시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성당에도 당시의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같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당의 구석구석에 관여하면서 마치 성당이 자신들의 놀이터인양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이 놀고 있는 곳이 지금까지 놀아오던 대로 편안하고 안락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니라 곧잘 정치활동을 합니다. 자신의 편이 누구이고 상대의 편이 누구인지를 나누고 자신의 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적대화하고 모여서 험담하고 뒷담화를 나눕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같은 이들이 너무너무 싫고 그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죽여 없애기라고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꾸며냅니다. 자신의 평판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거짓된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누군가를 돕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을 애써 소문을 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생색낼 걸 다 내면서도 자신은 그걸 '몰래' 하고 싶었다고 곧잘 표현합니다. 참으로 역겨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기심은 악마적인 감정으로 다른 이의 선한 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선의 정도에 따라서 시기의 강도도 달라질 것이며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었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로서 그에 대척하는 이들의 악은 더 강한 셈입니다. 복음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자신이 믿는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도행전의 대사제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꼴사나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영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그들을 미워하는 이들은 한데 섞여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의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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