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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어떤 식으로든 바라본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배우는 존재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한 번도 듣지 못했으면 그에게는 눈 앞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그 영원이라는 가치를 어떤 식으로든 볼 수 있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외견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내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존재는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뒤쫓을 때에 우리는 헛된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나의 소중한 몸에 몹쓸 짓을 하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까지 더 큰 일들까지 모두 보여 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여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꼬마 아이가 기껏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눈 앞에 놓인 사탕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꼬마 아이에게 그 아이가 자라서 크게 될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한 줌 사탕에 불과한 이 세상을 추구하느라 진을 뺍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영원의 미래상을 그려보일 수 있어서 그를 신뢰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예수님을 보낸 아버지를 신뢰해서 그분들이 보여주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누군가 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으면 결국 우리와 분리되어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그들로 인해서 고통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반대로 그들이 들어서 우리와 함께 부활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그것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훗날 심판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오늘 주님의 자비가 세상에 펼쳐지는 동안 성실하게 복음을,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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