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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화된 고해의 위험성




세상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들은 돈벌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를 추구하면서도 그 죄를 단죄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죄인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 그녀를 단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간파했고 그것으로 여인을 돌팔매에서 구해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했지만 핵심적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 즉 자신의 삶에서 수많은 오류를 경험한 이들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씩 떠나갑니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배웠던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말은 앞서 38년을 앓아 온 사람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인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결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여인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 체험으로 다시는 죄악으로 다가서지 않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무사히 넘겼으니 다시 새로운 죄의 대상을 물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결정하게 여지를 남겨둡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봅니다. 그러나 때로 그 안에서 절박함이나 진실성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저 습관화되고 의무적인 고해를 보는 사람이 많고 다시 얼마든지 같은 죄를 반복할 의도가 다분한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오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실 그 순간이 중요하다기보다 오히려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과연 그들은 고백한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 속에 살아갈까요? 아니면 더 나빠지기 위해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를 뿐일까요? 이는 열린 결말입니다. 아무도 그 끝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주님의 사제로서 고해소에 들어오는 이에게 또 한 번 용서를 선물할 뿐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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