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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 용서 2026년 9월 13일 주일 [(녹) 연중 제24주일]


 



화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용서에 대한 집회서의 말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것입니다.


"분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에 앞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앙심을 품고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죄짓는 사람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한 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간 누구든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우리 눈에 드러난 이들의 죄과는 일부분일 뿐이고 사실 많은 이들의 죄과가 속에서 일어납니다. 아무리 정의로운 판관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의도'까지 식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심판하고 복수하고 죽이고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신앙인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정의를 신뢰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한 이론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에누리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화내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불의를 견뎌낸 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용서


우리는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흔히 '무조건적인 용서'를 떠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복음처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니 그냥 모두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용서의 전제는 뉘우침입니다. 상대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죄를 짓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인데 그저 그 피해의 대상인 우리가 일흔 번이고 천 번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뉘우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뉘우치는 죄인'에게 베풀어 지는 것이 용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인자한 주인이 그냥 다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먼저 말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물건을 주려는 데 받으려고 손을 내밀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귀한 유리잔을 건네 주려는데 받으려는 손이 없으면 그걸 내밀어 떨어뜨리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그 유리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질 것이고 그러면 받으려는 사람도 없는데 그것을 주겠다고 내미는 사람이 분명히 잘못한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가 먹기 싫다는 데 억지로 떠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것이기보다 달리 말하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와도 같습니다. 그 근거는 내가 먼저 한없이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과 신앙인이 갈립니다. 세상 사람은 신을 믿지 않으니 자신이 무엇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심지어 그가 뉘우치고 용서해 달라고 해도 잔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손해가 다 메워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상대를 풀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았고 많은 것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뉘우칠 때에 그를 자유로이 풀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와 같은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소중한 구원이라는 선물을 자격이 없으면서도 먼저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길을 선물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용서라는 주제는 참으로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결국 용서라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신앙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용서도 올바로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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