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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가족

가족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자면 다들 가족인걸까?

여기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걸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필요를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먼저는 혼인이라는 거룩한 계약과 피를 나눈 기초 공동체라는 것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가족마저도 파괴되어 문제긴 하지만 이 측면의 가족은 천애고아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측면의 가족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고 기대하는 형태로의 가족. 그것은 서로를 보듬고 받아들여주고 우리가 쉴 수 있는 터전이다.

이 두 번째 의미의 가족을 형성하는 데에 사람들은 많은 곤란을 겪는다. 서툴기도하고 방향을 잡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가족의 틀을 가지고 마치 결혼만 하고 애만 낳으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지내오기에 실제 가족이 형성되었을 때에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무심해지고 아내는 성가셔지고 자녀들은 문제를 일삼는다. 결국 쉬고 싶었던 자리, 마음을 안식하고 싶었던 자리가 그 자체로 전쟁터로 변해 버리고 서로 가족을 떠나고 싶어하게 된다.

먼저 '방향설정'을 해 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은 단순히 외적, 혈육이나 계약으로 결합된 무언가가 아니라, 내적으로 진정 결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되는 진리와 선과 사랑의 결합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은 한 인간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긴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꾸려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 자신 안에서 수시 때때로 발견되는 오류들이 가족 안에서도 수시 때때로 발견될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오류들을 나 자신이 끌어안고 내가 성장해 가는 것처럼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오류들 때로는 크나큰 오류들을 우리는 껴안아 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이 말이 의미하는 바로 가족은 말씀(진리, 사랑, 선)으로 성장해 나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 마주하게 될 소소한 어두움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나아가야 한다.

오늘은 방향 설정 정도로 마치고자 한다. 다음에는 좀 더 구체적인 가정의 모습을 꾸려나가 보도록 하겠다. (근데 그 글을 언제 쓸지는 모르겠다. ㅋㅋㅋ 오늘은 가정위원회에서 도움이 들어온 김에 필 받아서 써 본 글이기 때문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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