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전대사, 부분대사(한대사)


전대사, 부분대사(한대사)

찬미예수님,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왁자지껄~)
자자, 우리 친구들 조용히 해야 신부님 말씀 잘 들을 수 있겠죠?
다들 쉬하고 왔나요? 네, 좋아요.
오늘은 신부님이 조금 어려운 걸 가르쳐 줄거예요.
그러니까 잘 귀 기울여 들어야 해요 아셨죠?
(네에~ 까르르르르르)

오늘 신부님이 가르쳐 줄 건, '전대사'라는 건데요. 혹시 들어본 친구 있어요?
'대사관은 들어봤어요!'
아니아니 아니죠~ 그런 대사가 아니예요.
지금부터 신부님이 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누군가 쉽게 설명해달라고 해서 어린이 강론 형식을 빌었는데... 뭔가 이상하네요. 본론 들어갑니다.)

우리 친구 중에 누가 유리컵을 깨었어요.
그럼 우리 친구들이 놀라겠죠?
그리고 엄마에게 혼날 게 걱정이 되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엄마는 달려와서는 우리 친구들 보다도 더 놀래시면서
깨진 컵보다는 우리 친구들을 걱정해주시죠?
이게 하느님 마음이예요.
하느님은 우리 친구들이 잘못했을 때에
우리 친구들의 마음을 더 걱정해주시는 분이세요.
우리 친구들은 그래서 하느님에게 '잘못했습니다'하고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하느님은 우리 친구들을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청하면
그 죄는 기꺼이 용서를 받게 되요.
하지만 죄는 용서 받아도 아직 깨진 유리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어요.
이처럼 그 행위의 결과, 죄의 결과가 주변에 남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메꾸어야 해요.
그것을 보속(補贖)행위라고 하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 스스로 그것을 온전히 메꿀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무심코 퍼뜨린 헛소문이나 남을 험담하는 말들처럼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를 일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그렇게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죄의 결과들을
모조리 메꾸기 위해서 교회가 허락하는 특권이 바로 '전대사'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우리 친구가 컵을 깨었는데 그걸 치울 능력이 없어요.
그럴때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우리 친구가 앞으로 학습지 한 장 다 풀면 엄마가 저 컵 다 치워주마'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전대사는 소중한 것이지요.

이와 조금 다른 것으로 '부분대사'라는 것은,
그 모든 결과가 아니라 일부를 조금씩 치워 나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전대사는 교회가 정한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활동으로 다가오지만,
부분대사는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 단식, 자선'으로 이루어진답니다.

(죄송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ㅡ_ㅡ;;;) 어린이 강론 너무 힘들어요...)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