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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유

"넌 자유로와"
난 누군가에게 이 말을 몇 변이고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이 말을 해 준 이유는
1) 실제로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었고,
2) 나 스스로 이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방종과는 다른 이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의 범위는 사실 각자가 다르다.
각자에 따라서 달라지고, 각 영역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두 눈이 온전한 이에게는 숲 속을 질주하는 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장님이 숲 속을 질주하겠다는 건 '방종'이다.
외과의는 칼을 들어야 하고, 강도는 칼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 사랑의 범위에 따라 많은 걸 허락하신다.
사랑이 커지는 만큼 이런 저런 일들을 다루는 범위도 당연히 커질 수 밖에 없다.
제 사탕봉지만 아는 아이에게 나눠주라고 사탕 한 박스를 주면
그 친구는 제 입 속에 집어 넣는다고 다 가져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친구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올바로 쓸 것을 알고 있다.
돈을 주든, 명예를 주든, 권력을 주든...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랑이 풍족한 이들은 안타깝게도 있던 것마저 내려놓으려는 것이 일반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 돈과 명예와 권력은
그 자격도 없는 이들이 많이들 가지게 된다.
그들은 탐욕스럽게 자기가 지녀선 안 될 것들을 지니고는
늘 침을 질질 흘리면서 '더, 더' 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자유롭지 않으며,
그런 탐욕스런 행위들로 타인의 합당한 자유마저도 빼앗아 버리고 만다.

세상은 눈에 당장 드러나는 강도, 범죄자들을 많이들 비난하는데,
사실 보다 큰 규모의 진정한 범죄자들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경제'라는 이름 하에 그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하찮은 이가 나쁜 마음을 품으면
기껏해야 돈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정도로 끝나지만,
세상적 능력이 뛰어난 이가 나쁜 마음을 품으면 '정당하게' 사람들을 대규모로 죽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세상에 세계대전이 있었던 이유이다.
그것이 오늘날에 환경파괴가 있는 이유이고,
그것이 오늘날의 빈부격차가 생겨나 있고,
수많은 제3세계 빈민들이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도 갖지 못하고 죽어나는 이유이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 자유는 다름아닌 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인식,
나의 그런 사랑이 나의 자유를 보장하고,
기꺼이 하느님이 허락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기쁨.
이런 참된 자유를 여러분들도 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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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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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