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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것을 넘어서

입이 존재하기에 음식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입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음식들은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됩니다. 만일 인간이 귀만 달고 태어났다면(물론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산다는 가정 하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각기관들로 인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상이 필요하게 됩니다. 눈을 위해서 ‘아름다움’이 필요하고, 코를 위해서 ‘향기’가 필요하며, ‘촉감’을 위해서 감각되는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렇게 감각되어지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은, 우리가 그 감각 기관들의 중추인 ‘몸’이라는 것을 훗날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현세적인 감각에서 떼어놓는 과정입니다. 즉 우리에게서 눈과 귀와 코와 입과 피부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리들에 전혀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던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시선이 들어서게 되고, 세상의 향기를 인지하던 감각에 천상의 향기를 인지하는 수단이 들어서게 되는 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천상의 영광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천상의 향기는 하느님의 선하심입니다.

그 일이 벌어지게 되는 날,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 오던 것을 상실하는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10년 동안 바이올린만 연주하던 사람이 왼쪽 손가락을 모두 잃게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바이올린 밖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제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이올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아오지 않은 음악가,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선택한 음악가는 설령 손가락을 잃는다 하더라도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할 충분한 여지가 있는 셈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다 참된 것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현세를 살아갑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가진 것을 누리고, 또 부족한 이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면서 ‘나눔’이라는 가치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배우고 누리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그 안에 내재된 본질적인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그만 피상적인 것에 얽매이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상적인 삶을 유지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때의 상실감은 지금의 세상에서 뭔가를 잃는 상실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의 삶 가운데에서 내면의 본질을 찾는 이들은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찾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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