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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방문기

휴대폰을 등록을 하고, 은행일을 보고, 교구청을 가고, 필요한 것들을 좀 사고, 사람들을 만나고... 헌데 이게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한 일주일은 그냥 방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시간도 바뀌고 날씨도 바뀌니 결국 덜컥 고뿔에 걸리고 말았네요. 약을 이리저리 챙겨 먹었는데도 머무는 방이 우풍이 세어서 한기 때문에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침을 삼키면 내 목구멍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확실하게 표현해 주는군요. ㅋ

돌아다니면서 이런 저런 서비스를 접했는데 한국은 참으로 발전한 나라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휴대폰을 등록하는 곳에서는 아이패드 앱으로 아예 등록을 받더군요. 서명도 아이패드에 직접 하고... 참 신기했습니다. 은행도 어찌나 깨끗하고 서비스가 빠른지요. 아, 고속도로 주행을 하면서 차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도로에 차선도 정말 깔끔하게 그려져 있구요. 제가 잠시 가족에게 빌린 차에는 네비게이션도 어찌나 상세하게 설명을 하던지요.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인터체인지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ㅠㅠ) 주유소도 빠릿빠릿하고 음식도 맛나고 같은 나라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편안한 일이었지요. 아, 무엇보다 카드 하나로 모든 기본적인 일이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도 인상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촌놈이라 은행에서 현금을 뽑아 들고 다녔습니다. 지갑이 두두둑 ㅋ)

동네들이 얼마나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없던 건물들, 빌딩들, 구조물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한국은 정말 물질적으로 부요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허’를 말이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나면 사람들은 아쉬움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삶의 진솔함을 찾는 이들과, 반대로 자신의 영적 공허를 더욱 큰 소비로 메꾸려는 이들입니다.

길가다가 출출할 때 붕어빵 하나 사먹으면 맛있고 하느님에게 감사드릴 일인데, 그게 붕어빵인지, 국화빵인지, 잉어빵인지, 황제잉어빵인지… 정말 정신이 몽롱해지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 뭔가를 먹는 아주 단순한 행위가 엄청난 선택을 해야 하는 아주 복잡한 행위로 변해 버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더이상 기초적인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니 아주 현란하고 고급스러운 것들을 가져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내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한 허영심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목이 타서 물을 마셔야 하는데 입에 달다고 탄산음료를 자꾸만 마셔대니 목은 목대로 마르고, 몸은 몸대로 비대해져가는 모습입니다.

이 수레바퀴를 깨닫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머리빠진 삼손처럼 내내 수레바퀴를 돌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생의 수레바퀴에 젖어들어 그것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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