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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의 외침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 1,24)

성경 안에서 등장하는 더러운 영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자 대뜸 외쳐 댄다는 소리가 의외로 ‘신앙고백’ 수준입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줄 알고 있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더러운 영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학식은 여느 평범한 신앙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여러가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나누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사랑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용서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하느님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는 걸 알지만 세상을 뒤쫓는 데에 혈안이 된 이들,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는 걸 알지만 주일 의무만 지키고 정작 주일을 엉망으로 보내는 이들…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내세우는 이들입니다. 아니, 신앙인들 중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신앙인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모든 의무 사항을 빠짐없이 지키기에 스스로를 ‘좋은 신자’라고 착각하는 그들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영들은 복종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갑니다. 다행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더러운 영들을 우리에게서 내쫓을 수 있습니다.

비록 나갈 때에 큰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한 사람에게 떠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반응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잃는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악습을 이겨내는 고통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해방의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충분히 감수할 만한 고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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