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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우리에게 한가지 역으로의 희망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자신들의 언어로 그 설명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바라보면서도 그분이 의도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 그분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널찍한 길이 아니며 좁은 길이고 험한 길이기 때문에 걸으려는 사람도 없고 걷기 시작하다가도 용기를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실망하고 맙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미워하고 싶은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낮아지라 가르쳐도 서로 높아지려 싸우던 제자들이고,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는데 빵을 걱정하는 그들이었습니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결국 모범으로 보여주면서 십자가에까지 매달렸지만 제 목숨을 살리고자 도망가버린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명을 다하지 않고는 돌아오는 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유다 이스가리옷) 당신의 말씀은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듣는 순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깨닫지 못했지만 깨닫기 위해서 노력했고 결국 깨달은 바를 삶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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