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기대하지 못한 놀라움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코 복음 6장의 3절과 6절에 나오는 대비되는 두 구절입니다. 한 부류는 다른 한 사람을 향해서,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다른 부류를 향해서 가지는 상반된 모습입니다.

‘못마땅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그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요. 이 경우에는 그들은 예수님이 약하고 부족하고 못난 인간이기를 바라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현재’는 그들에게 ‘못마땅함’이 됩니다. 상대의 장점, 좋은 점, 선한 점이 그들에게 못마땅함이 되기에 그들의 안에는 ‘시기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함께 기뻐해주지 못하는 악하고 고약한 마음입니다.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놀라움’

무언가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것을 보았을 때에 보이는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면서 이를 느낀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형편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낸 가장 축복받은 바로 그 고향 땅에서 오히려 사람들의 믿음이 더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된 예수님은 ‘놀라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에게 적어도 다른 고을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고 계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면 놀라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물이 언다는 사실은 한국 사람에게는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더운 지역 사람에게는 엄청 신기한 일이지요. 그들의 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어는 얼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예수님은 고향에서 충분한 은총을 쏟아 놓으셨지만 고향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반대로 닫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도 놀랄 수 있다는 말이고, 인간의 자유는 신적인 권능으로도 예상 밖의 일이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은 기대하지 않은 믿음에도 놀랄 것입니다. 마치 백인 대장이 뜬금없는 믿음을 드러내셨을 때에 기뻐하신 것과 같이 말이지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시기를 느끼는 대상이 있지는 않습니까? 즉, 다른 이의 좋은 것들을 나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이 잘 되는 꼴에 배가 아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놀래키고 있을까요? 어느 방향으로 놀래키고 있을까요? 얼토당토 않은 배신의 행위로 그분을 놀래키고 있을까요? 증오와 시기와 불의와 기만으로 그분을 놀래키나요? 아니면 반대로 진실과 정의와 사랑과 용서와 인내로 그분을 놀래키고 있나요? 우리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