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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변명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 4,9)

카인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여야 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말을 꾸며대는 존재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이것이 주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카인은 아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악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 거짓을 말하게 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거짓과 더불어 카인의 변명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변명은 늘 거짓된 마음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가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분명 아이는 뭔가 그릇된 행동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변명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뿐이지요.

여기에서 잠깐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부모의 행동입니다. 아이의 변명은 아이의 거짓을 드러내지만, 아이가 거짓을 말하고 변명하게 하는 부모의 행동도 문제입니다. 물론 창세기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악을 행하시지 않기에 창세기에서는 전적으로 인간의 오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가 거짓을 말하고 변명을 이야기하면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비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세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인은 아우를 지켜야 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증오하지 말았어야 했고, 죽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형으로서 아우를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변명하는 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하느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자기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진실함’만이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는 태도가 됩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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