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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구령

예수님이 입을 닫으라고 할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광고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를 두고 예수님은 사실 알려지기를 바랬는데 아닌척 반대의 방식을 썼다고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실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치유받은 이가 당신의 명을 따르기를 바라셨지요.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 셈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났고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것은 무조건 알린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입을 닫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외적으로만 분별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진정으로 좋은 것은 퇴색되게 마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현자가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현자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관심이라는 것이 영적 관심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세속적 관심이 더 많지요. 그래서 그 현자를 이리 불러다 놓고, 저리 불러다 놓고 하는 동안 역으로 현자의 안에 채워져 있던 영적 기운이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인기만 잔뜩 입은 껍데기 현자만 남게 되지요.

좋은 것을 찾았으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야 하지요. 그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일입니다. 좋은 이를 만났으면 그와의 신실하고 진득한 우정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입을 닫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벼운 마음은 알게 된 좋은 것을 떠벌리느라 너무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지니고 있던 좋은 것, 충분히 누릴 수 있던 것마저도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르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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