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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양들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예레 23,3)

나는 양인가 아닌가? 아주 단순한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혼란스런 양상을 드러내는 주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양일까요 아닐까요? 양은 무엇을 두고 양이라고 부르고 그럼 양이 아닌 존재들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문제에 답을 하셨습니다.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것이었지요. 헌데 오늘날 과연 우리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아마 성당에 다니는 유치원생들에게 물으면 그 아이들이 주님의 목소리를 더 잘 알아들을 것입니다.

- 우리 친구들, 친구들끼리 서로 싸우면 될까요 안될까요?
- 안돼요!!!!
- 불쌍한 친구 있으면 도와야 할까요 그냥 둘까요?
- 도와야 해요!!!!
- 자기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 드려야 할까요 그냥 잘까요?
- 기도해야 해요!!!!

물론 오늘날에는 부모님들에게 좀 엉뚱한 교육을 받아서 일단 싸우면 이겨야 하고, 불쌍한 친구는 근처에 가면 안되고, 하느님에게 기도 드리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대답하는 아이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양들은 주인의 목소리를 압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는 ‘살아남은 양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양들을 의미합니다. 세례의 외적 행위를 채운 ‘문서상 양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촉망받는 직분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도리어 바라던 상급은 커녕 벌을 받고,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곳에 조용히 머무르던 이들이 찬란한 영광을 입게 되는 일이 빈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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