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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마태 11,28)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한 고생이고 무엇이 진정한 짐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그러한 것들을 지곤 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외적인 시야로만 분별하려고 들기 때문에 늘 ‘안락’을 찾습니다. 즉,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가능하면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요행’입니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처럼 운좋게 억만장자 하나를 만나거나 로또에 당첨 되어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해 온 그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그런 비현실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 안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약간은 불만족스런 상태에서 현재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나가는 셈입니다.

진정한 고생과 무거운 짐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 노동과 수고는 고생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진정한 고생과 무거운 짐은 ‘진실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 내면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영혼이 고생과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안락함을 얻더라도 그 안락함이 ‘도둑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영혼이 고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남의 것을 갈취해서 누리는 평화라면 거짓 평화이고 언제라도 그 갈취당한 이에게 다시 빼앗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곤 하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으니 먹고 마시고 놀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느님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사랑하지도 않았고 사랑할 마음도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입과 배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고생과 무거운 짐을 떠맡고는 하지요.

이런 이들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 다른 이와의 참된 사랑의 관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그는 타인을 위해서 수고할 줄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다만 그 수고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때에만 그렇게 하지요. 그런 ‘사랑 없음’이 결국 다시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은 진정한 고생과 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벗어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반대로 자진해서 고생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꼴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그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문제이지요. 그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본인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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