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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진정한 구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마다에게 구원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의미로 작용합니다. 자신이 관심 가지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 지상에서 마늘 엑기스 광고를 하면서 ‘구원! 구원!’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늘 엑기스를 먹고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었지요. 그 광고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건강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오랜 시간 병세에 시달리다가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지요.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업이 실패한 사람은 사업을 성공하는 것이 구원이 되겠지요.

하지만 참된 구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영원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 영원의 질서라는 것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기쁨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의미하지요. 그것 외에 우리는 다른 희망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고민하던 문제들이 해결될 수도 있지만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즉 전에 없던 문제에 더욱 시달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고 계시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까요? 어찌보면 간단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지닌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희망을 지닌 이들이고 우리는 영원 안에서 희망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습은 그들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서 희망을 얻지만 우리는 영원을 이 땅에 적용 시키는 데에서 희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이 더욱 가까워지는 데에서 희망을 얻는 셈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땅에서 육신이 나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건강은 건강대로 감사드리고 아픔은 아픔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껴안으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 올라 앉아야 하지만 우리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영원의 사명을 수행하느라 바쁘고 행여 높은 자리가 주어져도 그 자리의 의미를 알기에 기꺼이 사양하기도 합니다. 세속의 부귀 영화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는 필요한 것 이상을 지니는 것은 엇나가기 쉬운 길일 뿐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르니 시기를 당하고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쓰이는 ‘구원’이라는 의미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간직한 희망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는 참된 구원을 간직해야 하고 세상 안에서의 온갖 부당한 대우에 인내하고 참아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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