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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야 한다.

예수님은 커리큘럼을 짜고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셨고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용하셨습니다. 곁에 농부가 있으면 농부의 예를 드셨고, 바닥이 있으면 그 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을 적으셨습니다. 그걸 모은 것은 제자들이었지요. 그마저도 정확하고 딱 떨어지게 모인 게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를 4개나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계획이 없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나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에게 찾아갔지요. 그리고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한 계획을 날짜를 잡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계획에 따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제 시간에 제 일을 딱 떨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일분 일초에 맞춰서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닮은 농부셨지요. 씨를 뿌리고 나면 싹이 트고 열매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난의 씨앗’이 심겨진 것을 아셨고, 그것을 추수할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을 알고 계셨고 머지 않아서 그 결과가 다가오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직 미흡하지만 신앙의 싹이 뿌려졌고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겠지만 다시 뉘우치고 돌아와 당신의 양들을 돌보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참으로 바쁩니다. 약속한 시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 준비되지 않으면 바로 화를 내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미리 많은 준비를 해 두었다가 제 시간에 꺼내야 해서 늘 긴장되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삶의 모습을 바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천천히 익어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 안에 뿌리신 사랑의 씨앗이 점점 자라나 싹을 틔우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씨 뿌리는 사람이 필요하고 추수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의 입에 먹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욕심내려다가 된통 당해서 가진 걸 잃는 경우는 많지요. 그러나 사실 그 모든 것들은 미리 예비된 것들입니다. 욕심의 씨앗은 언제나 불행을 선물해 주지요. 반면 꾸준하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상급이 마련되어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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