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삶을 건드리는 신앙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은 당신의 삶 안에서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면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실천함을 통해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지만 서로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의 표현을 들으면서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지만 두번째 표현에서는 불편함을 느끼지요. 왜냐하면 그 표현이 나의 구체적인 삶을 건드리고 일어나 움직이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이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서 적당히 귀에 아름답게 들리는 소리만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를 일어나게 하고 걸어 나가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저 있는 자리에 머물러 안주하게 만드는 신앙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를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이끌어주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전한답시고 나근나근한 말을 둘러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들의 진실성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시인은 될 수 있어도 참된 신앙 안에서 예언자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의 직분은 예언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진실한 예언자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그 예언자들은 대부분 세상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오류, 불의, 거짓, 악의 앞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삶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다만 필요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더해주는 그런 신앙을 기다리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 문명의 시기에 너무나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약을 먹어 다이어트를 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신앙마저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것이 아닐런지요. 즉 자신이 실제로 움직여서 개선되어야 하는 영적 여정을 다른 누군가가 표현한 아름다운 말마디를 들으면 자동으로 나의 삶이 개선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인내를 기르기 위해서는 인내를 길러야 하는 상황에 처해야 하고, 사랑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의 사랑을 꺼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야 하는 법입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과 실제로 마주한 상황에서 내가 인내를 의지적으로 선택할 때에 비로소 인내가 생기는 것이고, 내가 온 마음을 쏟아서 사랑을 내어주어야 할 대상 앞에서 비로소 나의 사랑이 실제로 활동하고 성장해 가는 법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백마탄 왕자를 꿈꾸는 십대 소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댓글

장순용 요셉님의 메시지…
신부님...공유합니다...^^~♡♡♡
장순용 요셉님의 메시지…
신부님...공유합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