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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얻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재산을 얻을 수도 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술 작품을 만나도 우리는 무언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이 얻는 것마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값을 매겨 서로 주고 받습니다. 즉, 노동에 가치가 있어서 무언가 수리를 하고 나면 수리비를 제공합니다. 또 무언가를 배우고 나서도 그 배운 값을 치릅니다. 하지만 '거룩함'에 대해서는 사실 따로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 거룩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의심합니다.


제가 일하던 남미에서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한 가치를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옛 우리 조상들도 그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제가 한국땅을 밟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아무리 코쟁이에 한국말을 어눌하게 해도 그가 사제이고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평신도들의 희생이 존재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는 전혀 반대의 장면이 연출됩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사제를 퇴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물론 사제가 세속 사람보다 더 세속적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할 수 있는 장상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수넴에 사는 한 여자는 자신의 집에 들르는 사람의 영적 가치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편안함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음식을 내어놓고 자신이 가진 공간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이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을 줍니다. 즉 아들이 없던 여인에게 아들을 선물해 줍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얻어내고 있을까요?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은 자녀가 '잘 된다'는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적은 노동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녀의 마음이 올곧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며, 영적으로 위험한 일을 피하고 고귀한 가치를 찾아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는 것입니까?


멍청한 부모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자녀들의 마음이 세속적 욕망에 한껏 사로잡혀 이미 더럽혀져 있는데도 그들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지금 사업이 성공해서 아주 떵떵거리며 잘 산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외적인 부와 성공의 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더러운 타락을 바라볼 줄 안다면 그들은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를 느끼고 자녀들의 회개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나의 공간을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엘리사를 대하는 수넴 여인이 실천한 일이고 그 여인은 한 아들, 즉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인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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