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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씨앗




신뢰라는 것은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가치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샀는데 그 물건이 새 물건이 아니고 하자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가게의 신뢰는 바닥날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악인들 사이에도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신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그 신뢰는 훗날에는 반드시 무너지고 말겠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닌 존재는 '영원'을 약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신뢰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존재의 약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운동을 해서 살을 뺀다고 하고 오늘 마음이 바뀌어 간식에 손을 대는 우리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도 분명한 한계를 지닙니다. 그는 '영원'을 살지 못하니까요.


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하느님' 뿐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 하느님 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영원을 쥐고 계시고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예수님의 별칭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그 몫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바톤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세에서 그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사명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에 내가 그 사명을 다 이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명은 자신을 완성해 줄 다른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충실한 신앙의 기회가 마치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선물된 소중한 기회입니다. 사람들은 성가시고 귀찮은 신앙의 영역에서 멀어지면 편할 거라고 생각 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다가온 완성의 기회를 스스로 내던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다가온 말씀 선포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충분한 양분이 되어 저에게서 그 말씀이 선포되고 자라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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