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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그분의 위치에 다른 것을 절대로 끼워넣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흔히 가톨릭을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 '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의 표현이 '모든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금지하는 계명으로 잘못 해석되곤 합니다. 하지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가지 예술로 표현된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내면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 됩니다.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철 없는 어린아이가 입이 험한 부모에게서 욕설을 주워 들어 그걸 반복한다고 그 아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하는 말에 올바른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의 입술로 발음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이름에 어긋나는 행실로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 자체를 비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경우가 됩니다.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고 고해소에서 털어놓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을 많은 경우에 놓치고 있습니다. 계명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을 가장 훌륭하게 완성하는 것은 가장 거룩한 기도이자 십자가의 희생 제사인 성찬례에 함께 참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세속과 연계된 일을 쉬어야 하고 미사에 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핵심은 '거룩함'을 완성하기 위함이지 그 행위들 자체를 율법적으로 완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생명을 다루기 위해서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 의사는 주일에도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민의 발이 되어 주는 버스기사도 주일에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맡은 일을 거룩한 사명으로 수행하며 짜투리 시간에 '대송'(여러가지가 가능, 기도, 선행, 자선등 / 주님의 기도 33번이 보편적)을 통해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혈육의 부모를 포함해서 모든 연장자에 대한 고려가 함께 들어가는 계명입니다. 사랑은 일반적으로 내리사랑이고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관심 밖으로 밀려나가게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자연스러운 사랑의 방향을 거슬러서 부모를 비롯한 나이든 이들에게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이는 그들이 공경할만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 훌륭한 사랑의 실행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이는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수많은 생명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낙태(인공수정도 잉여 수정란의 폐기 과정에서 낙태로 이어집니다), 사형제도, 안락사, 자살 등등의 여러가지 사안에서 교회는 분명한 반대 입장을 고수합니다.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세계에서 교회의 목소리는 자꾸만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생명 수호의 사명을 확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육. 간음하지 마라.

간음은 정당한 부부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인 관계에 대한 것을 금지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성이라는 것은 쾌락의 주요한 수단으로 쓰여졌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이 쾌락에 탐닉해 왔습니다. 막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동의 책임을 올바로 질 수 있는 건전한 정신을 기르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신앙 안에서 자발적인 '정결'에 대한 거룩한 의지를 드높일 수 있다면 더욱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라고 하는 가르침처럼 재화는 인간을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게끔 도와주는 도구로 쓰이고 그렇다보니 부당하게 다른 이의 몫을 가져오는 도둑질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이가 함부로 가져가 버리는 것이 싫다면 당연히 나 역시도 다른 이의 것을 함부로 가져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비단 재화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가 쌓은 공로를 마치 내 것인양 함부로 취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거짓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남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는 거짓은 당연히 지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외에도 거짓은 여러가지 면에서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에 대한 어떤 것을 자랑하다가 은근 슬쩍 자신의 일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우에도 사실 일종의 '거짓'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거짓이 심각한 이유는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지 몰라도 그것이 누적되고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심각한 다름 범죄로 쉽게 넘어가게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고 바로 그 거짓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구렁에 집어 넣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직하게 살고 마음이 거짓으로 물들었다는 것이 식별되면 고해성사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 마지막 두 가지의 계명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의 엇나간 욕구 마저도 올바로 다스리기를 바라는 계명입니다. 음란과 탐욕은 작은 싹처럼 자라나 결국 간음과 도둑질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첫 싹을 잘 식별하고 잘라 버리도록 도와 줍니다.


사실 십계명은 계명 하나하나에 원래부터 번호가 따로 부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탈출기와 신명기 등에 등장하는 계명의 나열을 교부들의 구분법에 따라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구분을 따라 이렇게 정한 것입니다. 계명은 타 종교와 다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의 핵심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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