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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순시기의 금요일에...

오전 내내 '그리스도의 수난' 동영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만들어서 
이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준비 중이다.
일찍이 이 동네 사람들의 유별스러움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십자가의 길은 반드시 걸어다니면서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랄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일단은 오늘의 취지를 잘 설명해주면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본당에 와서 마치 카펫 속으로 숨겨놓은 더러움이 삐져 나오듯이
사람들과 만나면서 조금씩 이 새 본당의 숨겨져 있던 부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알력다툼.
애써 감추려 하지만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
멈추지 않는 고발…

강론 때면 '사랑'에 대해서 부르짖는다.
하지만 솔직히 나부터 쉽지가 않은 건 사실이다.
촉을 세우고 달려드는 이를 향해서 '사랑'이라니…

오늘은 지난 주임 신부님의 허락으로
우리 본당 운동장에 장비들을 들여놓은 한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내가 한국에 어느 신부님을 아는데…" 듣자하니 인맥 이야기다.
바로 대꾸했다.
"저하고 아무 상관 없거든요."
그러자 이 아저씨 작전을 바꾼다.
"내가 광산업을 하고… " 듣자하니 재력 이야기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아저씨의 수작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거 저런거 다 필요없으니 속히 운동장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빼내 달라고 부탁했다.
안그럼 누가 여기 함부로 들어와서 물건에 손 대어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네들이 겁내는 건 재산의 손해일테니 말이다. ㅎㅎㅎ
들어오니 다른 신부님이 걱정이다.
"형 그러다가 우리 소문 나쁘게 내면 어떡해요?"
허허… 잠시 생각해 봤는데,
그것 역시도 나에겐 별 상관없는 소리인 것 같다.
내 명성은 없어도 그만일 뿐더러 그 사람이 퍼뜨릴 소문으로 흐트러질 내 명성이라면
그런 건 개나 줘버리지 뭐.

사실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오직 하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파멸의 구렁텅이에 넣을 권한을 지니신 분이다.
그런 그분을 우리 스스로 무시해서 우리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으니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모르겠다.

이제 곧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체감시켜 줄 때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들 중에 늘 나를 눈물짓게 하는 장면이 있으니
넘어진 아기 예수님을 안으려고 뛰어가시는 성모님의 장면이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보니
의외로 나 굉장히 감상적인 모양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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