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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속에 머무는 우리(과학과 종교)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패드에 담아간 물리학의 최근 이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요즘 과학자들은 참 멀리도 갔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입증할 수 없는 내용을 들고서는 서로 이론만으로 갑론을박중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수많은 것들을 수학적으로 쫓아가지도 못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근본 개념들은 이해할 만한 것이며
영성적인 영감을 많이 주는 것이다.
끈이론과 암흑물질, 다중 우주론과 같은 이론들은
영성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려는 나의 노력에 적지 않은 영감을 준다.

물론 교회는 일찍부터 하느님과 세상을 설명해왔으나
때때로 내세워야 하는 '신비적' 영역, 
인간의 머리로 담을 수 없는 그 영역 때문에 
눈에 보이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는
세상과 과학이라는 분야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쉽상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진정 세상 만물의 창조주시라고 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보이는 곳, 즉 입증할 수 있는 영역 속에서
그 안에 숨겨진 원리들을 탐구하고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연결해야 하는 사명을 지녀왔다.
과거의 사람들이 그러해왔듯,
우리는 우리의 지혜가 확장되는 그만큼 사물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이해를 바탕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갈 것이다.

이제 시선을 돌이켜 종교가 꾸준히 해 오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으며,
하느님께서 표현하신 바대로 '너희는 또 다른 신'이라고 부르시는 
우리 유한한 인간 존재를 만드셔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에 초대하고 있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음색을 지닌 우주인 셈이고
새로운 우리들이 더 늘어날수록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주도 더욱 늘어나는 셈이다.
다만 이 각기다른 개개인의 결합은 
오직 '사랑' 안에서만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
즉 '사랑'에 반대되는 것들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미움, 질투, 시기, 분노, 슬픔, 탐욕'과 같은 것들이며
그러한 것들은 우리 서로서로를 오히려 밀어내고 갈라놓는다.

나로서는 현대 과학이 내놓는 가설과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 속에서
엄청난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록 우리의 지혜가 밝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 주어진 것들을 사용해왔고,
또 우리 내면에 이루어지는 것들을 감지하고 가꾸어왔다.
우리는 컴퓨터의 구조를 몰라도 이미 컴퓨터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설명 그것을 속속들이 모른다해도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으며
다만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나로서는 우리 인간의 목적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뜻에 따르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을 닮아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지혜를 다해 우주의 신비를 탐구해 나갈 것이고,
다만 알려지지 않은 무엇이 남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이 뒤바뀔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영혼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이것에 헌신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밝혀본들
모든 것은 허무요 또 허무인 셈이다.
사람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아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서 말씀은
진정 변하지 않는 진리인 셈이다.

이제 나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이 일에 헌신할 다짐을 새로이 한다.
나로서는 이보다 더 명확해 보이는 일이 없다.
세상의 지식을 갈구하기보다
나로서는 나 스스로의 사랑에 어긋난 방향들을 감지해내고 이겨나가며
내 눈 앞의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이다.
내가 돌아가는 곳에서는 '진솔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에게 앞으로 어떤 시련과 도전이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이런 생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나의 짧은 생은 굉장히 다이나믹하고
당신을 알게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오직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이다.

덧붙여 이 설레임과 행복의 여정에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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