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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페3,18)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표현은 우리로서는 ‘공간’을 표현하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간 안에서 숨쉬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물리학을 설명하고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의 이 표현은 사도 바오로가 원하는 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뒤의 문장에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대로 마음 깊이 느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다시 돌아와보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상응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속좁은 사람’은 그야말로 이 내면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너무나 작아서 다른 것을 품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몇 푼 차이로 신경을 쓰고, 소소한 일까지 경계를 하면서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을 두고 속좁은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이런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무난하게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에 시비를 걸고 모든 것에 역정을 내곤 하지요.

속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넓은 아량을 지닌 사람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들은 사소한 문제에 반응하지 않고 늘 큰 뜻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묵묵하게 그쪽 방향으로 걸어가지요. 마음의 품이 넓으면 넓을수록 품어 안을 수 있는 일의 크기가 커집니다. 이들은 왠만한 것들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내면, 즉 영혼 안에는 마찬가지로 공간, 물리적 공간이 아닌 영적 공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상에 살아가신 분들 중에 가장 큰 공간을 품은 분은 우리의 성모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마음에 담아두기 선수이셨으니까요. 오죽 하면 사랑하는 당신 아들의 십자가 앞에 서서로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신 셈입니다.

그런 내면의 크기를 분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속 좁은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이 속을 키우도록 도와 주어야 하겠지만, 섣불리 나서다가는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먼저는 우리의 내면의 품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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