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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일삼는 자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분이 가르치던 길거리에 함께 머물렀지만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보좌 신부를 할 적에 수많은 분들의 식사초대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없었고 모두 주임 신부님의 식사 초대 자리에 꿔다 놓은 봇짐처럼 끼어서 만나게 된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정치 이야기에 경제 이야기 같은 제 일상적인 영역 밖의 주제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제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주제가 그러한 이들이 어디 다른 데에 나가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할 리가 만무합니다. 아니, 어쩌면 사제 앞이라서 그나마 ‘겸손한 척’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 겸손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음식점이 얼마나 비싼 곳이며, 지금 앞에 나와 있는 음식이 얼마나 한정판인지 드러내기에 바빴으니까요. 한번은 멋모르고 초대받아간 횟집에서 무심코 집어먹은 별 맛대가리도 없는 회가 실은 한 접시에 십수만원씩 하는 엄청나게 비싼 참복회라는 걸 뒤늦게 알고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초대를 받고 그들이 먹는 엠빠나다(튀김만두)를 나눠 먹으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들의 체험을 듣곤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십수만원짜리 회접시는 없지만 사랑이 있으니까요.

훗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실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했었는지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금 머무는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게 되겠지요.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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