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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한 언쟁

오늘 시내에 나와서 상점 한 군데를 들렀습니다. 아주머니가 대뜸 하는 말이 동양인들은 돈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니예요. 저는 가톨릭 선교 사제예요.’라고 했더니, 그래도 어쨌거나 동양인들은 돈이 많답니다.

그리고는 제가 가톨릭인 걸 알더니 이런 말을 은근슬쩍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죠?’

‘예? 예수님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면 놓아 두라고 하셨지요.’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나요?’

참 상투적인 방법입니다. 보나마나 뻔한 개신교 신자였지요. 그래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잘 보세요 아주머니. 우상이라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는 것을 의미해요. 오늘날의 진정한 우상은 돈이예요.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은 성상 그 자체를 섬기는 게 아니라 성상을 통해서 성인들의 덕목과 참된 분 자체를 모시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뭔지 아세요? 다른 종교끼리 서로 존중해 주는 거예요. 싸우지 않는 거죠.’

사실 이런 걸 설명한다고 그 아줌마의 마음이 달라질 건 아니었지만 그 주변에서 듣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와 대면한 이유를 이해할 만 했습니다. 그저 잠자코 있을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 기회를 통해서 가르칠 필요도 있었던 거지요.

공연히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적개심을 가지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들입니다.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지요. 그가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하지 않는 이상은 서로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 혹시 주변에서 이렇게 슬슬 시비를 걸어오면 공연히 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논재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말 바뀌는 건 ‘논쟁’이 아닙니다. 사람이 바뀌는 건 타인의 모범에 의해서입니다. 신앙을 말로 다루지 말고 직접 살아가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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