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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대부’ 문화

남미 사람들은 ‘대부’에 대한 특별한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는 그저 세례 때에 잠시 들러리 서 주는 사람에 불과하지요. 물론 어른이 되어서 ‘대부’관계가 되면 조금은 더 끈끈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남미 처럼은 아닙니다.

남미에서 유아세례 ‘대부’가 되는 사람은 그 아이의 부모와 ‘한부모’(Compadres)가 됩니다. 서로를 그렇게 부르면서 아주 끈끈한 관계를 지속하지요.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찾아가면서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갑니다. 그래서 대부가 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가 되고 나면 그 자녀의 중요한 축제일마다 지원을 하게 됩니다. 15세 생일, 고등학교 졸업식, 결혼식 등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부자’ 대부를 고르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대부를 고르기 때문에 때로 재미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혼인 장애 상태의 대부(조당)’를 세우려 하거나, 심하게는 ‘가톨릭이 아닌 대부(개신교나 이단)’와 같은 이들까지도 대부로 세우려고 번번이 찾아오기가 일쑤이지요. 그래서 매번 이런 경우에는 설명을 해 주어야 합니다. 대부라는 것은 영적 아버지이고 영적 자녀들을 참된 신앙의 길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혼인에 장애가 있는 이들, 교회혼으로 하느님 앞에 뜻을 표현하지 않고 사회혼만 하는 경우에는 대부가 되기 곤란하고, 타 종교이면 더더욱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대부가 되기 곤란하다고 가르치지요.

참된 대부를 주선하려는 본당 신부와 친하고 힘있는 대부를 세우고 싶은 사람들과의 줄다리기는 계속되는 셈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가톨릭적 의미의 대부가 될 ‘자격’을 논한다면 그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현실 속에서 적절한 분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대부로 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교회혼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먼저 대부가 될 사람들이 가톨릭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주 곧은 주임 신부를 만나면 국물도 없는 셈입니다. 합당한 대부를 데려오기까지 자녀의 세례가 미뤄지는 수 밖에요.

오늘도 그런 케이스가 찾아와서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결국에는 수긍을 하고 대부를 세우려는 이들의 교회혼을 주선해 보겠노라며 돌아가더군요. 보살피는 주임 신부로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참으로 피곤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로 한 사람이 다시 신앙으로 돌아온다면 그것도 참으로 보람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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