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아들이는 세상은 우리가 허락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눈 앞에 존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가끔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라고 외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정은 거의 왠만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사정에 대해서 거의 ‘장님’ 수준입니다. 그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은 어디서 잘하고 좋은 옷을 사려면 어느 백화점을 가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어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설명을 하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를 못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셈이지요.
가령, 속에 무언가에 대한 욕구가 가득 찬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비로소 욕구가 해소되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 앞에 그 욕구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고 그가 뒤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는 스스로 ‘이해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에게 담배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이유는 그의 욕구가 그러한 실제적인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담배는 휴식 시간을 밝히 빛내주는 아름다운 기호식품일 뿐입니다. 하지만 훗날 폐에 문제가 생기거나 온 몸에서 담배에 찌든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구질구질한 냄새가 피어오르게 되면 그때 가서야 뒤늦은 후회를 하는 셈이지요.
우리가 허락하는 세상의 범위는 의외로 좁습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바운더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전혀 색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인 범위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범주로 들어가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연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전까지 규정하던 세상의 의미가 훨씬 달라져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정은 거의 왠만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사정에 대해서 거의 ‘장님’ 수준입니다. 그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은 어디서 잘하고 좋은 옷을 사려면 어느 백화점을 가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어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설명을 하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를 못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셈이지요.
가령, 속에 무언가에 대한 욕구가 가득 찬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비로소 욕구가 해소되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 앞에 그 욕구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고 그가 뒤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는 스스로 ‘이해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에게 담배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이유는 그의 욕구가 그러한 실제적인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담배는 휴식 시간을 밝히 빛내주는 아름다운 기호식품일 뿐입니다. 하지만 훗날 폐에 문제가 생기거나 온 몸에서 담배에 찌든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구질구질한 냄새가 피어오르게 되면 그때 가서야 뒤늦은 후회를 하는 셈이지요.
우리가 허락하는 세상의 범위는 의외로 좁습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바운더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전혀 색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인 범위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범주로 들어가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연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전까지 규정하던 세상의 의미가 훨씬 달라져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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